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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법 기고] [한겨레21] 의사가 결정하고, 남자가 동의한다

유엔의 건강권 침해 우려에도 여전히 합헌인 낙태죄 제한적 허용 조항 등이 침해하는 여성의 건강권·자기결정권

 

‘낙태’를 이야기할 때 관념적인 ‘생명권’과 ‘선택권’의 대결을 아직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과거의 법적 논쟁은 이 문제를 때로 지나치게 간단히 여성과 태아의 대결로 틀짓고, 생명권을 공익에, 선택권을 이기적 사익에 등치시켰다. 이러한 법적 틀지음은 도덕주의적이고 단정적으로 사회적 담론을 제한했다.

하지만 국제인권법은 임신중절에 대한 접근권을 인권의 하나로 보며 낙태를 비범죄화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여성의 건강과 생명에 직접적으로 연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후 사회적 논의에서 이 문제는 ‘여성의 재생산 건강과 권리 보장’ 관점에서 이뤄져야 한다.

합법적 임신중절은 재생산권의 하나

세계의 다수 국가들은 합법적인 임신중지의 경우를 정하고 있다. 최근 폴란드처럼 몇몇 국가는 전면적 금지를 선택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임신중지가 엄격하게 규제되는 곳에서도 몇 가지 예외를 두는데 여성의 생명 보호, 성폭행, 근친상간, 태아의 유전적 결함 등의 사유가 그러하다. 규제가 덜한 곳은 사회·경제적 사유나, 여성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위한 시술을 허용하기도 한다.

세계보건기구에 의하면 전세계에서 한 해 2200만 건의 안전하지 않은 인공임신중절이 일어난다. 매년 4만7천 명이 사망한다. 세계보건기구는 이 상황을 예방 가능한 것으로 본다. 충분하지 않은 성교육, 피임 정보 부족, 그리고 안전한 임신중절에 대한 제한된 접근으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재생산권은 더 직접적으로 사회권인 건강권에서 도출된다고 볼 수도 있다. 1994년 카이로 ‘인구 및 개발에 관한 국제회의’(ICPD)의 행동계획은 재생산권이 “부부 및 개인이 자녀 수와 이에 관한 시간적·공간적 환경을 자유롭고 책임감 있게 결정하고 이를 위한 정보와 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 기본적 권리, 그리고 그들에게 최고 수준의 성적·재생산적 건강 상태에 이를 수 있는 권리가 인정되는지의 여부에 좌우된다”고 보았다. 이렇게 임신중절에 대한 접근과 재생산권이 주로 논의되는 기반은 건강의 권리, 차별 금지와 성평등, 사생활의 권리 등이다.

한국은 임신중지를 전면적으로 금지하되 일부 경우를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입법례를 취하고 있다. 일단 형법 제27장 ‘낙태의 죄’는 낙태를 전적으로 금지한다. 모자보건법 제14조에서는 다섯 가지 예외적인 낙태 허용 사유를 들고 있다. 본인 또는 배우자가 우생학적·유전학적 장애나 질환을 가졌거나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준)강간 또는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 간에 임신된 경우의 윤리적 사유, 임신 지속이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의학적 사유 등이다.

현행 모자보건법에 드는 의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 배우자 동의 문제다. 법률상·사실상의 배우자가 동의해야 낙태는 합법이 된다. 미성년이거나 혼인하지 않은 경우는? 생부가 배우자가 아니면 배우자의 동의를 받는가, 태아 생부의 동의를 받는가? 배우자는 형법상 낙태 행위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나 모자보건법상 동의권은 가진다.

둘째, 사유들이 문제된다. ‘우생학적’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차별적이지 않은가? 모자보건법은 국가가 장애인 강제 불임시술을 했던 불행한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셋째, 기한의 문제다. 모체의 건강을 해친다 해도 임신 24주 내로 제한된다.

넷째, 어쩌면 가장 상징적 함의인데, 모자보건법에서 예외적으로 허용된 임신중지의 주체는 의사이며, 허용되는 행위는 그 의사가 하는 인공임신중절수술이다.

따라서 형법과 모자보건법으로 짜인 이 체계는 엄밀히 말하면 결정권과 재생산권을 염두에 두었다고 보기 어렵다. 생명이 생명답게 자랄 수 있게 하는 생부의 양육 책임도 부재하다. 이런 장면에서 ‘생명권’을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까. 제한적 허용 사유뿐만 아니라 여성의 신체를 통제하려 했던 법의 정신 자체가 문제적이다.

결코 ‘사문화’되지 않았던 규범

연평균 10건 이하의 기소 통계를 보면 낙태죄가 가지는 구체적 형벌의 효과는 미미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임신중지를 범죄화하는 규범의 힘은 언제나 생생히 살아 있고 결코 ‘사문화’된 적이 없다. 임신중지가 전적으로 불법이라는 법의 외침은, 개별적으로 수사해 처벌하지 않는다 해도, 이를 선택한 여성에게 죄의식을 가지게 하며 관련된 다른 법적 분쟁에서도 불리하게 작용한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2011년 한국 정부에 “당사국의 형법 제269조와 제270조의 조항에 따라 낙태가 처벌 가능한 범죄라는 사실에 대하여 우려”를 표하며 “낙태를 한 여성들에게 부과되는 처벌 조항들을 삭제할 목적으로 당사국이 낙태와 관련된 법, 특히 형법을 검토할 것을 고려하고, 위원회 일반 권고 24호(1999년)에 따라 안전하지 않은 낙태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 관리를 위해 그들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것”을 촉구했다. 이 권고는 ‘건강’이라는 표제어를 담고 있다.

형법상 낙태죄의 위헌성 심사도 있었다. 2012년 헌법재판소는 낙태죄로 기소돼 재판받고 있는 조산사가 형법 제270조 1항에 대해 낸 헌법소원사건에서 재판관 4(합헌):4(위헌)의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소는 “자기낙태죄 조항으로 제한되는 사익인 임부의 자기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 보호라는 공익에 비해 결코 중하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단순하고 자의적인 ‘기본권 충돌’을 상정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위헌 의견을 낸 헌법재판관 4명은 “형법상 낙태죄 규정이 현재는 거의 사문화되어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공익은 더 이상 자기낙태죄 조항을 통하여 달성될 것으로 보기 어려운 반면, 자기낙태죄 조항으로 제한되는 사익인 임부의 자기결정권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어 법익의 균형성 요건도 갖추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자기낙태죄 조항은 임신 초기의 낙태까지 전면적, 일률적으로 금지하고 처벌하고 있다는 점에서, 임부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여 헌법에 위반된다”고 보았다. 낙태죄는 위헌성의 혐의를 벗지 못했다.

누구의 몸, 누구의 권리인가

‘낙태죄’와 재생산권 논의는 ‘저출산 위기’를 걱정하는 각계 대표들이 마치 동등한 이해관계자 그룹처럼 나누는 ‘사회적 대화’여서는 안 된다. 불과 얼마 전 폴란드·아일랜드의 여성들처럼, 지금 여기서 한국 여성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직접적인 건강상의 위협과 자기결정권의 침해를 느끼기 때문이다. 정부가 정말 ‘저출산 위기’를 우려한다면, 마지막 피임 수단이 된 ‘낙태’라는 분절적 장면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여성의 성과 재생산의 권리와 양육이 입체적으로 보장될 수 있도록 관련 법과 정책을 정비할 때다.

*‘낙태’는 ‘태아를 떨어뜨려 죽인다’는 의미로 그 자체가 임신중지에 대한 낙인이다, 따라서 형법 용어로는 ‘낙태죄’, 국가 또는 타의에 의한 경우 ‘낙태’, 임신중지에 대한 의료적 개입의 경우 ‘인공임신중절’, 여성 자신의 의사가 포함된 경우 ‘임신중지’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류민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원문보기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4253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