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

소송 및 구제, 법·정책 연구, 교육과 연대를 통하여 인권을 옹호하고 실절적인 변화를 이끌어냅니다.

제4회 공익인권법실무학교 좌담회 “활동가와 변호사가 만났을 때- 활동가가 말하는 ‘변호사와 일하기” (상)

4회 공익인권법 실무학교 공개좌담회 녹취록 (상)

활동가와 변호사가 만났을 때 활동가가 말하는 변호사와 일하기

 

지난 2015년 2월 7일 제4회 공익인권법 실무학교 프로그램으로 <활동가와 변호사가 만났을 때 – 활동가가 말하는 변호사와 일하기’>이라는 제목의 좌담회를 진행하였습니다그 내용을 (), (), () 3회에 나누어 싣습니다


◇ 공개좌담회 기획의도와 소개 http://hopeandlaw.org/485

◇ 연재순서

(패널 발언(1) : 이미경(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장여경(진보네트워크 활동가)

(패널 발언(2) : 기선(인권운동공간 활 활동가), 한가람(희망법 변호사)

(플로어 질의응답


장서연 오늘 사회를 맡은 장서연 변호사입니다. 저는 저 스스로를 활동가가 아니라 변호사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 변호사보다 활동가가 더 뛰어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웃음). 제가 공감에서 일하게 된 계기도 운동판에 멋진 활동가가 있어서였습니다. 그런 대표적인 멋진 활동가로 여기 나와 계신 네 분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개좌담회는 공익인권법 실무학교 1회 때부터 계속 있어왔는데, 2, 3회 좌담회의 주제가 법과 소송이라는 일종의 도구, 수단, 방법에 대한 논의였다면. 오늘은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이 전체 운동에서 어떻게 자신을 위치 짓고 활동가들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변호사와 활동가의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보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좌담회는 네 분의 모두(冒頭) 발언을 간단하게 듣고 나서, 플로어에서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순서로 진행하려 합니다.

패널1: 이미경(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반성폭력 운동의 법제화 과정을 통해 보는 변호사와 일하기



장서연 첫 번째 패널이신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님께 부탁드린 모두발언 주제는 반성폭력 운동의 법제화 과정을 통해 본 변호사와 일하기입니다. 이미경 선생님은 지금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님으로 계십니다. 이미경 소장님은 활동을 시작하신지 얼마 오래 되셨죠?

 

이미경 1990년도에 한국성폭력상담소 만드는 작업을 처음 시작해서 24년 되고 있네요. 물론 그 기간 중에 학교에서 강의하고 공부하는 시간도 있었지만, 반성폭력 활동가로 24년을 해오고 있습니다.

 

장서연 반성폭력 운동이 변호사와 활동가가 협업해온 대표적인 케이스이지요. 이제 어느 정도 제도화되기도 했는데, 제도화 전후로 변호사들과 어떻게 함께 활동해왔는지, 또 그 과정에서 가지게 된 고민들 또는 문제의식에 대해서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이미경 (ppt를 켜며) ppt 화면에 웃는 여자들 사진을 넣어보았습니다. 그동안 반성폭력 운동하면서 저희들은 항상 뭐를 고쳐라, 뭐를 처벌하라는 식의 주장을 했었는데, 이렇게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위해 활동한다는 우리의 비전을 담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이런 사진을 담아봤습니다. 저는 이런 물음들을 가지고 이 자리에 왔습니다. 반성폭력 법제화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활동가들은 변호사들과 어떤 협업을 해왔는가. 그동안 함께 이루어온 성과는 무엇이고, 아쉽거나 더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인가. 앞으로 함께 가고 싶은 방향은 무엇인가.

 

반성폭력 법제화 과정에서 변호사의 역할

 

1991년에 한국성폭력상담소가 한국에서 최초로 성폭력상담소라는 이름을 달고 문을 열었습니다. 90년대 당시에 성폭력 범죄는 친고죄로 6개월 이내에 고소를 해야 했고, 직계존속을 고소하지 못하게 한 형사소송법 224조 때문에 근친성폭력 피해자들은 아버지가 성폭력을 저질러도 고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신고율은 2.2%. 형법 제32조 제목이 정조에 관한 죄였던 상황이었습니다. 19911, 성폭력 피해자 여성이 21년 전 자신을 강간했던 이웃집 아저씨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1992년 자신을 강간한 의붓아버지를 피해자 여성이 남자친구와 함께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건들을 지원하며 척박한 법현실에 대한 문제제기를 시작했습니다.

 

왼편에 있는 사진이 김부남 사건입니다. ‘나는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짐승을 죽였습니다라는 피해자의 말로 잘 알려진 사건이죠. 이 사진은 김보은·김진관 사건인데 아무리 김○○, △△이라고 하더라도 당시에 저희가 김보은·김진관 사건 공동대책위라고 대책위 이름을 지었기 때문에 나중에 김보은 씨가 출소하고 가장 먼저 해야했던 일이 자신의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어요. 활동가들이 정말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물어보기는 했었는가. 우리가 이들의 구명운동을 한다면서 우리 맘대로 이름을 붙여서 활동한 것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되었고, 그 후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였습니다. 이 사건에는 무려 22명의 변호사들이 무료변호인단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저희 활동가들은 사건을 지원하며 정당방위를 주장했습니다. 21년 전에 있었던 성폭력(김부남 사건) 그리고 13년 간 계속되어왔던 친족성폭력(김보은·김진관 사건)에 대항해 가해자를 살해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법조인으로서는 정당방위 주장이 쉽지 않았을텐데 공동변호인단도 이에 동참해 우리가 이 주장을 끌고 갈 수 있는 커다란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당시 정당방위 주장은 인정되지 못 했지만요. 그 다음에 바로 현행 성폭력 관련 법이 무엇이 문제이고 친고죄가 왜 문제인가에 대해 활동가들, 변호사, 학자들이 모여 문제제기를 하면서 성폭력특별법제정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진은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성희롱 법제화를 하는 과정이 진행되었죠. 변호인단이 구성되어 63개월 간의 법정 투쟁을 거쳐 승소하였고 1999년부터 직장 내 성희롱에 관한 법이 마련되었습니다. 모든 직장에서 직장 내 성희롱 교육을 하게 되는 이러한 역할들을 변호사들이 함께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변호사들이 사건 지원에 함께 하는 공동변호인단의 한 사람으로, 성폭력 가해자를 살해한 피고인의 변호인으로, 성폭력 피해자의 고소대리인으로 역할을 해 주셨습니다. 2004년에 처음으로 아내 강제추행에 관한 유죄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아시다시피 1970년도에 아내 강간은 인정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었는데, 이명숙 변호사가 2004년에 고소대리인의 역할로 이런 판결을 끌어냈지요. 이후에 아내 강간죄도 인정받는 변화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성폭력특별법은 법제정을 위한 특별위원회가 만들어져 활동했는데 지금 국회에 계시는 이종걸 변호사님 사무실에 가서 우리가 원하는 성폭력특별법이 무엇인지 논의했습니다. 당시 대통령 선거가 있었기 때문에 후보들이 다 와서 법 제정을 하겠다고 했지요. 결국 각 당에서 우리의 초안을 받아서 발의를 해 성폭력특별법이 만들어지는 성과가 있었습니다. 그 후로 피해자 권리를 보장하는 법제도, 가해자를 처벌하는 법제도가 이렇게 많이 생겼습니다. 저희는 지금은 가해자를 괴물화시키는 방식이 과연 성폭력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냐는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성폭력 특별법 제정 이후의 활동들

 

, 그런데 이렇게 법을 만들었는데 2차 피해가 일어나는 거죠. 우리가 모두 노력해서 함께 만든 법을 가지고 성폭력 상담 현장에서 상담 일지를 조사해 보니까, 사법절차에 들어간 분들의 25%정도가 2차 피해를 겪었다고 호소를 하십니다. 그래서 이러한 2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성폭력을 조장하는 대법원의 판례를 바꾸라는 운동을 했습니다. 저희가 1년 동안 매달 판례 평석을 한 자료집을 대법원 및 각급 법원 판사 및 검사들에게 보냈는데 여기에 변호사님들이 평석을 해주는 역할을 하셨습니다. 변호사들이 참여하지 않았다면 저희가 하긴 힘든 사업이었구요. 성폭력 수사·재판 시민감시단을 만들어서 전국에 130개 성폭력상담소들이 있는데 우리가 지원하는 사건들에서 어떤 형사, 검사, 판사가 문제적인지, 또는 어떤 분들이 잘 하고 계시는지 11년째 총 141사례를 선정해서 매년 발표하고 있습니다. 여기 심사위원으로 변호사들이 참여해서 함께 하고 계십니다. 성폭력 2차 피해 관련한 국가를 대상으로 손해배상소송2003년부터 쭉 해오고 있는데요. 여기 보시는 바와 같이 밀양집단성폭력사건에서 비인권적인 수사에 대해서 국가 책임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고, 2005년에 처음으로 국가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이어서 나영이 사건 같은 경우에서도 국가책임을 인정하게 되었고 이 모든 과정에 해당 단체가 함께 했지만, 관련하는 변호사님이 법리를 구성하고 함께 싸워주셨기 때문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운동 현장에도 변호사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계십니다. 각종 토론회에서 발제하고 시위현장에 함께 하고, 각 연구과정에 함께 하고, 무료법률상담을 하시구요. 저희 상담소에서 20년이 넘게 상담을 하고 있는 변호사님도 계십니다. 거의 가족같이 지내면서 실제적인 법적 도움을 주고 있으시고 거의 단체 상근활동가와 같이 활동하고 계십니다. 오늘 같이 강의에 참여하신 김차연 변호사님이 저희 상담소에서 주최한 토론회에서 발표를 하시기도 하구요, 여기 국선변호사제도 관련 토론회 사진 속의 이찬진 변호사님 등 많은 변호사님들이 여성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정부정책 제언 및 필요시에는 직접 시위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함께 가고 싶은 길, 함께 가고 싶은 방향

 

함께 가고 싶은 방향을 생각해 보았는데요. 제도적 차원에서 생각해 본다면, 피해자 변호사의 인권감수성 교육이 체계화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요. 인권감수성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집체교육을 해서 되는 건 아니란 거죠. 로스쿨에서 젠더법 관련 수업에는 소수만 참여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변호사로서 일정 기간 NGO에서 활동하는 것이 어떨지. 우리한테도 도움이 되지만 그 분들한테도 자산이 될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게 제도화되는 것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하고 있구요. 그리고 NGO 활동에 다양한 기부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법적인 상담으로 재능기부를 해주실 수 있고, 또 후원회원으로 함께 해주시면 물적인 기반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저희 성폭력상담소에 변호사 한 분이 상근자로 계셨던 적이 있습니다. 가족이 함께 외국으로 가시게 되어 6개월밖에 활동을 못 하셨지만요. 그 분이 당시에 이런 얘기를 하셨어요.나는 현장에 오면 변호사로 바로 역할을 할 줄 알았는데 여기서는 여성주의 시각으로 항상 나를 돌아보게 한다, 여성주의 시각을 갖기가 이렇게 어려운지 현장에 들어오기 전에는 미처 몰랐었다. 성폭력피해의 특수성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데 나는 법조인으로서 소위 객관적인 기준과 틀 속에 자꾸 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스스로 보게 된다고 이야기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이렇게 단체활동가로서 삶을 선택하는 것도 멋질 것 같습니다. 어떠신지요? 급여는 연봉 1800만원, 그것도 많이 올라서 그 정도입니다(웃음). 그렇지만 저희 NGO는 사회의 맥박이라고 생각합니다. 법률전문가들이 NGO와 함께 운동을 할 때 인권감수성과 성폭력 특수성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법적인 합리성, 객관성에 피해자의 목소리, 피해자의 경험이 얼마나 반영되어있지 않았는지를 많은 학자들, 활동가들이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에 법조인들이 함께 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활동가들의 열정과 법조인들의 전문성이 함께 한다면 그 시너지가 엄청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패널2: 장여경 (진보네트워크 활동가)

변호사 상근자가 있는 단체 안팎의 경험으로 보는 변호사와 일하기


 

장서연 , 질문거리가 많이 생기셨죠? 일단 패널분들 모두발언을 다 듣고 나서 플로어로 마이크를 넘기겠습니다. 다음 패널은 정보인권과 관련하여 거의 유일하게 활동하고 있는 진보네트워크의 장여경 활동가이십니다.

 

장여경 제가 처음으로 사회단체 활동한 곳이 한국성폭력상담소입니다(웃음).

 

장서연 장여경 활동가는 정보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척박한 한국사회에서 고군분투하며 오래 활동해오셨습니다. 그리고 최근 진보네트워크에 상근변호사가 들어왔지요. 어떻게 하다가 진보네트워크에 상근변호사를 두고 일하게 되었는지도 궁금하구요, 그동안 단체 안팎에서 변호사들과 활동하며 느꼈던 문제의식이라든가 여러 의견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장여경 제가 여기서 나쁜 얘기 하면 소문이 들어가는 거죠? (웃음) 한국성폭력상담소가 1800만 원이에요? 저희보다 약간 높군요. 저희 상근변호사님은 공감에서 지원을 받고 있어서 당장 2년은 걱정 안하는데, 그 이후가 걱정이겠죠. (*정리자 주: 진보네트워크의 상근변호사는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공익변호사 자립지원사업 대상자로 선정되어 2년 간 재정지원을 받고 있다.)

 

활동가란 누구인가

 

활동가라고 하면 직관적으로 와닿으세요? 어떤 토론회 갔는데, ‘장여경 화활동가?’라고 어렵게 소개하시더라구요. 이해가 잘 되시면 다행입니다. 보통 간사라고 부르는 단체도 있어요. 간사는 전문가와 대중 사이를 연결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활동가를 전문가를 보조하는 역할로 보는 관점이 아무래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간사와 활동가라는 단어 사이에도 이런 측면에서 긴장이 있습니다. NGO는 우리 사회의 맥박이라고 하셨는데요. 저는 크게 두 가지인 것 같아요. 우리의 역사나 일상은 그냥 흘러가잖아요. 사회구조도 계속되고, 체제도 계속되는데, 거기서 사건을 만들고 도모하는 것, 늘 있던 일을 늘 있었던 일이 아니게 되도록 사건을 도모하는 것을 저는 활동이라고 부릅니다. 사건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많은 자원이 필요하지요. 그 많은 자원들이 굉장히 흩어져 있어요.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누군가는 그 구슬들을 꿰어야 활동이 가능합니다. 그렇게 꿰는 역할, 자원들, 특히 사람을 포함해서 주변의 환경들을 이어가는 것이 활동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법률적인 전문성은 그냥 1/n이라고 생각하구요.

 

제가 전업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98년 진보넷을 만들면서부터입니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어요. 모두 몸으로 부딪히면서 배워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처음 맡았던 역할은 조직하는 역할이었어요. 어떤 이슈를 발굴하고, 그 이슈에 반대하는 흐름을 조직하는, 그런 것이었죠. 처음에는 정책적 역할은 전문가들의 것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입법대안은 변호사들에게 맡겨두고 사회적 대안은 교수들에게 맡겨두고 이런 방식이었죠. 2000년대 초반까지 활동가는 조직가로서 역할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사회가 좀 바뀌었어요. 참여정부가 등장하고 나서 인권의 제도화라고 할까, 활동가에게도 법제도에 대한 견해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처음으로 법전을 떨리는 마음으로 보던 기억이 납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어떤 법에 대해서 의견을 말해달라고 전화가 왔는데 그 법이 이제 막 처음 만들어지려는 법이었어요. 당연히 듣지도 보지도 못한 법이죠. 거기에 대해서 의견을 말하라는데 내가 여기서 잘못 애기하면 국가인권위가 잘못 판단하는 건가하고 땀을 뻘뻘 흘린 기억이 납니다.

 

굼벵이도 구른다고 하나, 제가 맨날 보는 법이 몇 개 안되잖아요. 저도 어느덧 어떤 종류의 법에는 익숙해졌어요. 그래서 이제 어디가서 변호사 못지않은 활동가다라는 말을 듣습니다(웃음). 그 말을 해 주신 분은 물론 칭찬의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죠. 근데 저는 살짝 기분이 나빴어요. 기분이 왜 나빴을까 그것을 아직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두 가지 정도에서 문제인식을 가졌던 것 같아요. 하나는 종사하는 직업을 두고 사람의 등급을 나누나 그런 느낌이 들었고. 사실 그 분은 그런 나쁜 의도로 그 얘길 하신 건 아니었어요. 전 심지어 변호사를 부리는 활동가라는 말까지 듣거든요(웃음). 그런데 제가 궁극적으로 문제의식을 느꼈던 것은 사회의 변화를 가져오는 활동의 영역을 전문지식의 영역,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합리성의 영역으로 보는 그런 관점이 그 이야기에 깔려 있다는 점이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잘못된 제도가 있으면 그 제도는 합리성에서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잡으면 되는 문제라고 보는 관점이죠. 물론 그런 합리성의 추구나 신뢰, 믿음이 굉장히 큰 동기가 되긴 해요. 사회를 고치고자 하는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사회는 굉장히 비합리적인 힘들이 경합하고 부딪히는 곳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공익법에 관심있으신 여러분이 합리성을 추구하는 방향을 바라보고 사회운동에 들어오게 되면 굉장히 기대에 어긋나고 실망하시게 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바깥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좋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사회단체에도 분쟁이 있고 갈등이 있고 보기 싫은 나쁜 부패가 있기도 해요. 이쪽에 있는 분들이 우리 편, 다 좋은 사람이 아니고, 이 안에도 권력관계가 있고 성폭력 등의 문제가 있고 문제제기를 끊임없이 계속 해야 해요. 사회의 변화를 합리성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면 사회운동 내부에서부터 상당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단체 안에서 변호사와 함께 활동하기

 

사회단체 안에서 활동하는 변호사를 저희가 처음으로 모시게 되었는데 저희가 처음에는 변호사를 모집한 것이 아니었어요. 활동가 채용 공고를 했는데, 변호사가 오게 된 거죠. 이전에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였어요. 저희가 DNA법 대응 활동을 할 때 그 분은 민변 인턴으로 계셨고 회의를 함께 몇차례 하게 되었는데, 저희가 어떤 활동을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재밌다, 관심있는 영역이다라고 하시면서 겸사겸사 인연이 닿게 되었습니다. 근데 이 분이 단체에서 활동을 처음 시작을 하면서 원래 기대하는 것에 많이 못 미쳤을 거라고 봐요. 일단 하나는 소송이나 법적인 분쟁보다 다른 일들이 훨씬 많다는 거. 이것을 저희는 재생산 노동이라고 표현하는데, 단체에 소속된 사람들끼리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단체를 운영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들이 굉장히 많아요. 저도 98년에 활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 당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 단체소속 변호사님이 소송을 진행할 때도요, 다른 변호사들 모여계신 곳에서는 실무를 담당하는 분들도 보통 따로 있는데요. 이 분은 서면의 어디에 도장을 찍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부터 혼자서 실무적인 고민을 해야 하는 거죠. 여러 가지 사무적인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또 한 가지는 좀더 중요한 문제인데요. NGO 활동하시는 분은 그런 로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법률로써 소송으로써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기여할 것이라는 생각. 저희도 이분이 오시면서 여러 가지 소송 기획을 하기 시작했어요. 예를 들어 예전에는 아이템이 하나 생기면 희망법도 찾아 가고 민변도 찾아 가고 해야 했는데, 이제는 제가 직접 가지는 않아요. 저희 단체에 변호사님이 계시거든요. 이렇게 안에서 회의하고 하는 것은 좋은데, 문제는 단체에서 기획하는 소송은 보통 어려운 소송인 경우가 많아요. 이기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저는 일 년에 하는 소송이, 당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많게는 열 건 정도 되는데, 그 중에 이기는 경우는 5년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해요. 대개는 다 지는 소송이에요. 그러다보니 단체 소속 변호사가 자기 자신의 역량을 키우고 뭔가 보람이 남기까지 장기간 시간이 걸린다는 거죠. 이거면 될 거 같았고, 이거는 합리성에 어긋나는 것이고, 이렇게 의욕있게 막 진행하다가 소송에 지면 소송비용이 막 날아와요. 1심에 150만원씩. 그러면 이 비용은 어떡하지 하면서 보람을 느끼기도 전에 머리부터 싸매야 하죠.

 

DNA법 대응 사례로 보는 활동의 실제

 

마지막으로 활동가와 변호사가 어떻게 만나는지에 대해 실제 사례를 들면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제가 옆에 계신 기선 활동가와 기획하고 진행한 것이 DNA법 소송입니다. DNA법 제정 때부터 활동가들은 이 법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의견을 내고 시행과정에도 주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용산 철거민들과 쌍용차 노동자들도 DNA 채취 대상으로 들어간다는 사례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활동가가 이런 사례를 문제 삼기로 결정하면 이제 바빠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거 어떡하지, 누구한테 연락을 해볼까, 어떻게 해서 알리지, 일단 기자회견부터 해볼까? 그럼 네가 기자회견문을 만들래, 그래 내가 쓸게. 이렇게 해서 논의 그룹을 만드는 거예요. 변호사님들도 들어오시고 법적인 대응도 해보자 하는 거죠. 법적인 대응은 두 가지가 있어요. 입법대응도 하고 사법대응도 하고. 대응 초기였던 당시에는 아직 헌법재판소에 대한 로망이 있었기 때문에 무조건 헌법소원 아니냐, 이렇게 해서 헌재 소송을 제기하게 되는 거죠


문제는 작년 8월에 헌재에서 합헌 결정이 나왔어요. 그러면 후폭풍이 불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동안은 검찰이 노동자들이나 시위사범에 대해 DNA 채취를 하러 오라고 연락을 했다가도 거부하면 헌재에서 아직 심의중이니까 굳이 강요를 안 했거든요. 헌재에서 합헌결정이 나니깐 엄청 강하게 압박을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같이 활동해온 동지들도 오랫동안 기대했던 소송이 확 지면 일단 멘붕이 돼요. 한동안 연락을 잘 안하기도 합니다. 그 때에는 이런 심정도 들죠. 우리가 역사에 죄를 지은 것 같다, 괜한 소송을 해서 합헌결정이 되고저는 2005년도에 나왔던 지문날인소송 때문에 역사에 죄를 지은 것 같다고 생각해요. 그 소송이 지금도 다른 소송의 발목을 잡고 있어요. 그 결정의 주요취지 중 하나가 경찰은 모든 종류의 전자데이터베이스를 경직법이나 경찰법에 따라서 별도의 구체적인 법률 없이 다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었거든요. 이렇게 되니깐 지문 DNA 데이터베이스도 합헌이 났고, 채증 관련해서 공익소송을 하려고 해도 어차피 경직법이나 경찰법으로 된다고 할 텐데 이렇게 되고. 회의 중에 그때 누가 소송하자고 했냐 막 그러고그런데 이번에도 DNA 소송에서 지니깐 기운이 안 나는 거예요. 연초에 논의그룹에 있는 누군가가 우리 신년회라도 하자 그러는 거예요. 없는 기운에 우리가 모여서 뭘 하겠어 그랬는데, 막상 모여 보니까 또 사업계획을 막 짜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해볼까, 이건 어때, 그렇게 나쁜 상황은 생기지 않을 거야 하면서 회의를 딱 마쳤는데 우리가 소송에서 이기건 지건 간에 인권침해 상담에는 계속 오는 거죠. ‘200*년도에 노동운동하다가 노동자들이 시청점거를 했는데 그 때 그 시청 점거죄로 DNA 채취를 하라고 한다, 내가 그 때는 활동가였지만 지금은 직장인인데 정말 황당하다고 하는 상담전화가 바로 그 다음날 왔어요. 그러면 기존에 논의그룹이 있으니깐 일이 빨리빨리 진행되는 거죠. 너는 민주노총에 연락을 해라, 나는 기자회견을 준비할게, 설문조사도 해볼까 하면서 일이 도모가 돼요


그러면서 여기에서 변호사는 법률적인 전문성을 가지고 역할을 하시죠. 이번에도 소송해볼까, 그런데 이번 소송은 헌재에서 합헌결정난 뒤라 질 겁니다. 처음엔 그런 의견들이 다수였어요. 근데 중요한건 계속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DNA 채취를 요구받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잠재적인 피해자들이 누군가 도전하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 용기를 얻고 자기 사례로 싸우고자 하는 힘이 나는 거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또 지더라도 한 번 해보자, 입법도 해보자고 해서 입법안 회의도 해봤어요. 그 과정에서 사건이 커지게 되었어요. 언론에 내보내니까 추가 제보가 들어오고, 또 대응하는 과정에서 우리 논의 그룹이 아닌 변호사님과도 연락이 닿아서 문제의식이 확산되기도 합니다. 이 분 하시는 말씀이 진작에 관련 상담 문의를 받았대요. DNA 채취 요구 받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래서 헌재 판결문을 봤더니 빠져 나갈 방법이 없더래요. 그래서 물론 부당하지만 지금 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채취되시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채취를 거부하시면 어차피 영장이 나오게 돼있습니다, 이렇게 상담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틀리지 않은 판단이지만 이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랑 연결되어서 이야기를 해보니깐 지는 싸움이더라도 도전을 해보는 건 도움이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앞으로 주변에 상담이 들어오면 도전을 제안하시겠다고 하셨어요.

 

활동의 의미와 묘미

 

사실은 저도 활동이 힘들어서 7년차 쯤 되었을 때 그만두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다시 온 거는 (내가) 요만큼 움직이면 (사회는) 이만큼 움직이는 묘미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그러한 움직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고, 중요한 것은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나가는 큰 틀 안에서 법률적인 대응을 함께 고려했을 때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참고로 저희 상근하시는 변호사님은 활동가 못지 않은 변호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웃음). 그런 식으로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 같아요. 변호사가 단체에서 상근한다는 것은 외롭고 자원도 별로 없고 특히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는데, 사회운동을 선택한 모든 활동가들은 다 같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거든요. 특히 오늘날 사회운동이 봉착한 어려움이 전망이 밝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5년에 한 번 이기는 소송이라도 있었지 요즘에는 10년에 한 번 이길까? 예전에는 저 같은 젊은 활동가들이 정부나 국회에 어떤 문제제기를 했을 때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조금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그런데 요샌 진짜 벽창호 같은 느낌이 들어요. 앞이 깜깜한, 이런 시대에 어떻게 서로의 지혜를 나누고 연대의 힘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해봤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제4회 공익인권법 실무학교 공개좌담회 녹취록 (중) 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