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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및 구제, 법·정책 연구, 교육과 연대를 통하여 인권을 옹호하고 실절적인 변화를 이끌어냅니다.

<변론기> 자살로 둔갑한 사고를 산재로 인정받다

희망법은 최근 <희망을만드는법 연간보고서 2019>를 발간하며 2019년 한 해 동안의 여러 활동들을 되돌아보고 그 의미와 과정을 꼼꼼하게 되짚어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중 의미 있는 소송에 대해서는 따로 변론기를 작성하였습니다. 변론기를 통해서 당시의 소송 과정과 소송에 담긴 의미 등이 여러분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자살로 둔갑한 사고를 산재로 인정받다

조선소 하청노동자 사망사고 산재소송 변론기

글 김동현

 

하청노동자가 조선소 작업장에서 사망했습니다

고 정범식 씨는 경력 15년의 베테랑 조선소 노동자였습니다. 긴 시간 조선소 일을 했지만 정규직 노동자는 아니었고, 일이 있는 조선소마다 옮겨 일을 하는 일명 ‘물량팀’이라고 불리는 비정규직 하청노동자였습니다. 사고가 있었던 2014년 4월 26일에도 울산의 현대중공업에서 하청노동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여느 날과 똑같이 오전 8시에 첫 작업을 시작했고, 쉬는 시간에는 밥맛이 없다고 투덜대는 동료에게 “내가 가지고 온 컵라면을 함께 먹자”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는데, 작업도구(샌딩기 리모컨)가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범식 씨는 동료에게 작업도구가 오작동이 일어난다고 하면서 다음 쉬는 시간까지 작업을 해보고 여전히 문제가 있으면 작업도구를 바꾸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이후 두 번째 작업을 시작하였고, 정범식 씨는 동료의 호스에 목이 감겨 난간에 매달려 있는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정범식 씨를 발견한 작업반장은 급히 호스를 자르고 그를 눕혀서 인공호흡을 했습니다. 그리고나서 정범식 씨는 병원에 후송되었지만 결국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발견 당시 어떤 이유에서인지 정범식 씨가 쓰고 있어야 할 마스크는 훼손된 채 벗겨져 있었고, 그의 눈과 목에는 분사된 쇳가루를 맞은 흔적이 있었습니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고, 정범식 씨가 어떻게 호스에 목이 감기게 되었는지 그 상황을 목격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경찰에 재수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 모습 / 출처 노동건강연대

 

자살이라는 경찰, 근로복지공단 및 1심 법원의 판단

사고 발생 직후부터 유족과 동료들은 정범식 씨가 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정범식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근로복지공단도 경찰의 수사결과를 근거로 유족들의 산재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1심 법원마저도 근로복지공단의 판단을 유지하였습니다.

경찰의 수사기록을 보면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판단하기 어렵다고 한 내용도 일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자살이라고 결론을 내린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난간에 매인 호스의 매듭 형태가 자연적으로 형성될 수 없고, 정범식 씨 외에는 그렇게 호스를 묶을 사람이 없었을 것이라는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정범식 씨의 핸드폰 요금 연체내역과 병원 치료 자료 등도 극단적 선택의 이유로 제시되었습니다.

 

출발점은 수사기록의 확보와 분석부터

근로복지공단과 1심 법원의 판단은 모두 경찰의 수사 결과에 터 잡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소송을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경찰의 수사결과를 깨뜨려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먼저 수사기록부터 확보해야 했습니다. 경찰에서는 두 번의 수사를 했었는데, 첫 번째 수사기록만을 유족에게 공개하였기 때문에 원고 측은 두 번째 수사의 경우 그 결과만을 알고 있었을 뿐 어떠한 수사가 이루어졌는지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비공개된 두 번째 수사기록의 공개를 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고 승소판결을 받아 수사기록의 대부분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확보한 수백여 쪽에 달하는 수사기록을 꼼꼼히 읽으면서 경찰 수사의 문제점을 검토한 결과, 경찰에서 행한 실험의 결함과 한계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정범식 씨의 방진마스크와 관련된 실험에 문제가 있었고, 그 결과 경찰이 도출한 결론에도 중대한 오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부분을 주된 쟁점으로 부각시키기로 하였습니다.

 

사고에 이르게 된 과정을 추론하기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산재소송의 입증책임은 원칙적으로 원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경찰의 수사결과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을 넘어, 사고일 개연성이 있다는 것, 즉 어째서 자살이 아니라 사고사인지는 원고가 입증해야만 했습니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이 과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하였습니다.

우선 사고를 직접적으로 목격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고현장에는 정범식 씨의 동료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사고 현장이 훼손되기는 하였지만, 당시 사고와 관련이 있는 여러 객관적인 증거들도 있었습니다. 대리인단은 한정된 물적·인적 증거를 조합하고, 당시 상황의 재현실험을 통해 사고에 이르게 된 과정을 추적했습니다. 작업장 설계도를 바탕으로 3D 그래픽을 제작해 현장을 재현하였고, 직접 구조물을 세우고 현장에서 실제로 사용하는 호스를 구해 매듭을 만들거나 마네킹을 이용해 사고의 가능성을 검토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증거를 하나하나 조합해 가면서 여러 시나리오를 구성하고, 이를 다시 재현 실험을 통해 하나씩 제거해 나감으로써 결국 어떻게 사고가 발생하였는지를 설명해낼 수 있었습니다.

 

임시로 비계를 설치하고 재현실험을 진행하는 모습

 

재판부 설득하기 : 구두변론과 프리젠테이션

경찰 수사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개연성 있는 사고 경위를 구성할 수 있었지만 재판부를 설득하는 것이 관건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소송 끝 무렵 재판부를 대상으로 구두 변론 및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하였습니다. 10여분의 짧은 프리젠테이션 시간 동안 경찰 수사의 문제점, 특히 방진마스크 문제에 집중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다시 한 번 정범식 씨의 방진마스크 사진을 스크린 전체에 담아 재판부에 제시하면서, “이 부분을 주의 깊게 살펴 달라”라고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3D 제작 설계 그래픽

 

원고의 주장을 받아들인 항소심 판결

항소심 법원은 1심 판결을 뒤집고 정범식 씨가 사고사하였으므로 산재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서울고등법원 2019. 8. 14. 선고 2018누 301090 판결). 구체적으로, ①정범식 씨의 샌딩기 리모컨이 전선 접촉에 의해 의도치 않게 작동할 수 있었던 점 ②정범식 씨가 착용하고 있었던 방진마스크 오른쪽 필터가 훼손되고 정범식 씨의 얼굴과 목 부위에 쇳가루가 묻어 있었던 점에 비추어 볼 때 정범식 씨가 리모컨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자신의 샌딩기에서 분사되는 쇳가루에 맞았고 이것이 눈에 들어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정범식 씨는 눈에 들어간 쇳가루 때문에 시야확보가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작업장 밖으로 나가 사다리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는데, 외부 비계를 통해 이동하는 과정에서 바닥에 놓인 에어호스가 몸에 감겼고, 그러한 상태에서 사다리 아래로 내려가려던 정범식 씨가 실족하면서 몸에 감겨 있던 호스가 위쪽으로 당겨져 사망에 이르렀다고 판단하였는데, 이러한 항소심 판결의 내용은 원고 측에서 주장한 내용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또한, 정범식 씨가 자살하였다는 근로복지공단의 주장과 관련하여서는, ①사고가 일어난 곳은 정범식 씨의 작업구역에서 떨어진 동료의 작업구역인데, 자살을 시도하려는 사람이 굳이 타인의 작업구역까지 이동할 이유가 없는 점 ②정범식 씨가 사고 발생 전날까지도 배우자인 원고와 통화를 하고 사고 당일에도 동료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등 자살의 동기가 확인 되지 않고 관련 전문가 의견서도 이를 뒷받침하는 점 ③눈에 쇳가루가 들어간 사람이 높이를 가늠하여 목을 매기는 어렵다는 점 등에 비추어, 정범식 씨가 자살한 것이라고는 합리적으로 보기 어렵다 판단하였는데, 이 내용 또한 원고가 주장해온 내용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산재 인정의 증거가 부족한 노동자에게 희망이 되기를

이 사건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금속노조 울산법률원(참여변호사 정기호),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참여변호사 김동현 김두나 박한희), 서강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리걸클리닉 센터(센터장 홍대식, 참여교수 이상수) 등이 대리인단을 구성하였고, 노동조합·시민사회단체·각계 전문가(심리학, 의학)들이 본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하여 재현 실험을 진행하거나 의견서를 작성하였으며 법학전문대학원 학생들도 판례 조사, 서면 작성 등에 참여하였습니다. 희망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소송에 참여한 이유는 이 한 사건의 승리를 위해서 이기도 하였습니다만, 나아가 하청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위험의 외주화의 현실과 산재소송에서의 입증 책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기 위함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소송이 목격자 없이 사업장에서 사망한 본 사안과 같이 산재를 직접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부족한 노동자들에게도 희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변론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