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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외치다, 사람인 까닭에… – 인권연구소 ‘창’ 류은숙 활동가

인권을 외치다, 사람인 까닭에…

– 인권연구소 ‘창’ 류은숙 활동가

 

 희망법, 처음 시작할 때 참 막막했습니다. 6명이 함께 할 수 있는 사무실을 마련할 수는 있을지, 과연 제대로 시작은 할 수 있을지 모든 것이 불안했습니다. 중국집, 카페, 세미나실 등을 전전하면서 사무실 개소를 준비하기 2개월여, 그때 인권연구소 창(‘창’) 한켠에 저희가 임시로 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준 분이 류은숙선배였습니다.

그 이후로도 정식 사무실로 이사하는 날 회의용 책상, 컵, 포스트잇, 스테이플러 등 필요한 것들을 꼼꼼히 챙겨주셨고, 사무실에 음식을 가져다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희망법 성원들이 고생한다며 몸보신을 시켜주신다고 창에 초대해주셨습니다. 

이날 인터뷰는 선배가 몇시간 동안 장보고 요리해서 준비한 음식을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인권운동을 하게 된 계기, 희망법에 대한 생각 등을 이야기하며 진행되었습니다. 

  

<사진 1. 2012년 희망법 창립행사 토론회에서 발표하고 있는 류은숙 선배의 모습>

 

 

데모를 싫어하던 1학년생에서 준비된 운동권으로

 

 

희망법: 선배님이 인권운동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궁금한데요.

 

류은숙: 처음에 제가 운동을 시작했을 때는 인권운동이란 말도 매우 생소할 때였어요. 저는 고등학교 때까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사실 대학생들이 학생운동 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대학교 1학년 때.. 86년도 건대사태라고 아시죠? 그때 처음 집회라는 걸 나가봤어요. 그때 학생들이 수백 명 잡혀갔는데 그럴 일이 아니었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들 석방하라고 철야시위를 했었죠. 근데 철야시위가 너무 힘들잖아요. 밤새도록 계속 앉아서 구호외치고그래서 새벽 5시쯤 마지막 구호 외칠 때 내가 이 짓을 다시 하나봐라하면서 나왔어요. 참여는 했지만 너무 지겹고 힘든거예요. 그랬는데 그 이후도 계속 충격적인 일이 있었어요. 김세진, 이재호 서울대 학생의 분신도 있었고그러니까 내가 알고 있었던 세상과 뭔가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을 안게 됐죠. 그러다가 저는 다른 고민 때문에 대학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그해에 자퇴했어요. 자퇴일자를 아직 기억하는데 1220. 학기말 고사 시작되기 바로 전날이었어요. 그해 시험보고 자퇴하긴 너무 억울하잖아(웃음).

 

자퇴한 후 6개월 동안 제가 한 일은 무작정 걷는 거였어요. 솔직히 돈도 없고 무작정 나와서 하루 종일 걷는거죠. 그러다보니 남산도 두 번씩 올라가고 한강도 여러 번 건너고 서울에 내가 안다녀 본 데가 없었죠. 6개월쯤 지난 후 다시 공부를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9살 먹은 여자애가 그냥 세상에 나와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깨닳은 거죠.

 

그렇지만 그냥 좋은 대학 나와서 출세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첫 번째 대학을 갔다면(그런데 막상 들어가보니 거긴 너무 딴 세상 같고 애들도 너무 부자고 그런게 싫어서 1년만에 대학을 그만 뒀는데), 다시 공부를 시작할 때는 6개월 서울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생각이 많이 달라진 상태였어요. 다행히 합격을 했고 그 겨울 입학 전에 재야단체 사람들의 강좌를 열심히 들었죠. 그때 조영래 변호사님 강의도 들었죠. 그래서 다시 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준비된 운동권으로 들어갔죠(웃음). 예전에는 내가 데모를 다시 하나봐라 했는데 새로 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누가 부르지도 않아도 참석을 했었어요. 지금도 기억하는게 1월에 학교에 등록금 비슷한 거 처리하러 갔는데 박종철 열사 추모식을 하고 있더라구요. 그때 추모식에 앉아서 참여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자연스럽게 내내 운동권으로 살았어요. 그렇게 시작했던 거죠.

 

 

생소했던 인권운동과의 만남, 그리고 인권운동사랑방

 

희망법: 인권운동사랑방(‘사랑방’) 만들어질때부터 같이 하셨다고 들었는데 그때가 언제였고 계기가 있었나요?

 

류은숙: 92년도에 만들어졌고, 저는 대학을 나오면서 바로 함께 하게 됐는데요. 91년도가 강경대 열사 정국이었어요. 제가 다닌 학교가 전국 투쟁 집결지였는데 저는 그 학교 선전국장이었어요. 그해 5월에 전국 운동권을 다 봤어요. 그때 건물 벽 전체를 덮는 큰 왕자보를 하루에 2-3개씩 썼었는데 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 중 한명이 졸업하면 뭐할거냐고 묻더라구요. 그때는 특별한 대답은 안했던 거 같아요.

 

그때 졸업하고 나서 사회운동을 하고 싶은 생각은 있었죠. 그때 마당발이고 저만큼 까칠했던 어떤 분에게 내가 졸업하고 사회운동을 하려면 어디가면 좋을지 물어보니 인권운동을 해보는게 어떻겠냐고 하더라구요. 근데 그때는 인권운동이라는 개념이 생소할 때라서 그게 뭔데라고 물어보기도 했었어요. 그리고 졸업하고 나서 인권운동을 구상하고 있는 사람들과 만난거죠.

 

그런데 그때 인권운동사랑방은 구상만 있었지 사무실도 없고 아무것도 없을 때였어요. 그냥 졸업하고 무작정 만난거죠. 그러고 나서 1년여 동안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사무실도 없으니까 제과점, 중국집 그런데 돌아다니면서 만나고 그때는 까페도 없고 다방이 있던 시절이니, 그런 곳을 돌아다니면서 만나고 그렇게 했었는데 이거 완전 전망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돈도 한푼도 없고곽노현 전 교육감이 자기네 사무실(민주주의법학연구회)을 그냥 쓰라고 해서 일단 몸 둘 곳을 갖게 됐어요. 그리고 인권 세미나를 시작하면서 주최자의 이름도 없이 세미나에 사람들을 부를 수 없으니 임시로 지은 이름이 인권운동사랑방이었어요. 938월에는 <인권하루소식> 준비호를 내기 시작했어요. 다들 한 달도 못갈 거라 했지만 그후 13년 동안 발행하게 되죠.

 

희망법: 아 그게 임시로 지은 이름이었구나! (웃음)

 

류은숙: 임시였어요. 편한 곳이 되자 라는 의미였죠.(사랑방처럼 인권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문턱없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 되자는 의미였죠. 그래도 우리의 지향을 보여야 하니 운동이란 말을 넣은 거구요.) 단체이름으로는 좀 이상하잖아요.

 

희망법: 임시로 지은 이름이 20년을 왔군요.

 

류은숙: 임시로 지은 이름을 계속 부르다 보니 못바꾼거죠. 그때 진짜 점심먹고 앉아서 10분만에 지은 이름이예요.

 

 

사랑방 운동원칙 선언

 

희망법: 사랑방 초기에는 돈도 없었고, 후원제도도 없었고. 운영하려면 힘들지 않았어요?

 

류은숙: 처음에는 돈을 받는게 아니라 운영비를 넣었어요. 정해져 있는 액수가 있는건 아니었지만 알아서 냈죠. 그러다가 94년때 쯤 체계를 갖추자고 해서 그때 최저임금에 맞춰서 35만원 활동비를 지급받았죠. 중간에 조금 더 받기도 했는데 한해씩 연차가 쌓여갈 때마다 만오천원씩 올려줬거든요.

 

그러다가 98년도에 사랑방 운동원칙 선언이란 것을 몇 년간의 논의 끝에 하게 됐어요. 그게 뭐냐면 운동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살지 않는다. 그러니까 월급을 받으면서 운동을 하지 않는다라는 독립군 선언이죠. 그래서 연차가 쌓일때마다 만오천씩 더 받았던 것도 동결. 과도기로써 당장 생활을 되어야 하니까 매달 활동비 35만원은 연차와 상관없이 똑같이 받는 걸로 했어요. 그리고 알바를 찾거나 생계 수단이 있는 사람은 그것도 포기하는 걸로. 그래서 아무튼 나 관둘때까지 35만원이었어요.

   

그리고 후원회원도 처음엔 한명도 없었어요. 인권하루소식 구독료라는 걸 받았는데 그것도 내면 내고 말면 말고였죠. 그러다가 후원회원이 늘어나서 100여명 정도가 됐어요. 그런데 지인, 지인의 지인, 이런 식으로 후원을 받다보니 어떤 사람들은 왜 이 단체를 후원하는지 모르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독립군 선언할 때 뜻이 없는데 학연지연으로 후원 받는거 할 수 없다고 해서 의사를 물어본 후 후원할 생각이 없다고 하면 정리했어요. 그때 제가 총무였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하는데, 어거지로 후원하던 사람은 대부분 그만두고 초창기부터 이름없이 후원했던 사람들 중심으로 43명 정도가 남았어요. 그러니까 후원금이 얼마나 되었겠어요. 활동비 35만원도 솔직히 힘든 구조였죠. 근데 어떻게든 빚도 안지고 버틴게 신기해요. 처음에는 사무실도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사무실도 얻게 되고. 사랑방은 그렇게 해서 지금껏 왔죠.

 

 

단체의 활동과 후원

 

류은숙: 지금은 사랑방 후원회원이 몇 백명 될 거예요. 그래도 그 몇백명이 생기는 계기가 싸움을 크게 할 때예요. 사랑방이 크게 알려진 게 97년인가 98년인가 불심검문 거부 캠페인을 할 때였죠. 그때 불심검문에 대해 소송을 하면 족족 이겼잖아요. 그럼 이긴 학생들이 국가배상 받은 돈을 후원했죠. 뉴스에도 탑으로 크게 났었구요. 그때 후원회원이 많이 늘었어요. 평소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던 문제였거든요. 왜냐하면 일반 회사원들도 막 검문 당하던 시절이었어요. 그 싸움을 잘 하니까 후원회원이 느는거죠. 그리고 크게 늘었을때가 인권영화제 탄압 받았을 때. 그때도 후원회원이 많이 늘었죠. 그런 식으로 우리가 싸움을 대차게 하면 늘더라구요. 근데 그런 싸움때 후원해 주신 분들이 지지도가 아요. 사랑방은 그렇게 버텨온거죠.

 

희망법: 사랑방 운동원칙이라는게 좀 궁금한데요. 어떤 점에서는 너무 원칙적인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류은숙: 저는 지키지 못하더라도 원칙이 존재하는 건 중요한 거 같아요. 왜냐하면 그게 불가능한 줄 알지만 그 선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게 원칙이라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93년 이후 문민 대통령이 들어서면서 사회적으로 민주화 물결이 체감으로 느껴졌어요. 군부독재에서 문민정부. 군부독재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이걸 잘 몰라요. 뭔가 사회가 확 풀렸다는 느낌.

 

그런데 그러면서 시민운동가라는 직업군이 생겼어요. 그게 사회의 진전이기도 하지만 긴장을 놓치면 운동가가 아니가 월급쟁이가 될 수 있는 위험도 있었죠. 그리고 단체가 생존에 연연하다 보면 하기 싫은 프로젝트도 해야 하고, 후원인의 눈치를 보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우리가 후원인의 눈치를 느꼈을 때가 월드컵 때였어요. 월드컵때 사랑방에서 스포츠로 중요한 이슈를 묻으려는 걸 비판하는 내용의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게 축구팬들에게 뭐라고 한 것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도 그때 한국 축구가 4강 간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흥분해 있던 시기라 자기를 비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때 붉은 악마가 새로운 물결이다, 광장의 문화가 발견되었다 하면서 칭송받는 분위기가 많았을 때이기도 했었는데 거기에 사랑방이 반론을 폈다고 비난을 하는 분들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월요일 사무실에 왔더니 서버가 항의글로 다운됐어요. 물론 후원회원이 단 2명 탈퇴했지만그런 상황이 있는거죠. 눈치를 안 본다는건 월급쟁이가 되어서도 안되지만 후원인의 눈치도 보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배가 고프더라도 이 원칙을 지켜가자고 한 거죠. 조금 민감하고 껄끄러울 것 같은 사안이 있을 때 후원인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선뜻 나서기가 힘들거든요.

 

희망법: 우리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후원에 대해 생각의 차이가 약간씩 있는데요. 옳은 일에 쓰면 되니까 후원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정말 확실하게 원칙대로 최소한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류은숙: 어느게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봐요. 직접 나설 수는 없는 여건이기 때문에 후원하는 것만으로 뭔가 기여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거든요. 근데 그런 사람에게 당신 후원은 필요없어라고 말하는 것도 운동으로서 올바른 자세는 아니죠. 후원 조직을 유지하려면 후원풀을 넓히는게 필요할 수도 있을 거예요. 매달 후원을 하면서 그곳에 계속 관심을 갖게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그 부분도 고려를 해야 하는거죠. 그러면서도 돈과 후원의 노예가 안되야 하는, 끊임없이 긴장을 해야 하는 거죠. 어느 한쪽이 정답이라 할 수는 없는 거 같아요. 사랑방이 그런 원칙을 택했던 건 주변 시민단체들이 그런 긴장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는 긴장해야 된다 그래서 그렇게 했던 거구요. 그래서 솔직히 돈 아끼기 위해 구차한 짓도 많이 했죠. 사무실이 석유난로로 난방을 하는 곳이었는데 그나마 그 석유도 우리가 싸게 살려고 배달을 안 시키고 주유소에 통 갖고 가서 직접 사왔죠. 배달료 500원인가 그거 아낄려고 양손에 석유통을 들고 계단 4층을 올라가고(웃음)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인권연구소 으로

 

              <사진 2. 인권연구소 창 로고>

 

희망법: 사랑방을 나오시고 인권연구소 을 새로 만드셨는데 어떤 새로운 구상이 있어서였는지, 아니면 혹시 갈등이 있어서 나오신건가요?

 

류은숙: 둘다죠. 한 단체에 너무 오래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원래는 평 활동가로 한 조직에 뼈를 묻는게 한때 꿈이었어요. 왜냐하면 운동조직에서 그런 경우가 별로 없더라구요. 위계도 생기고. 사랑방은 운동원칙선언과 함께 직급을 없앴어요. 모두 다 활동가로. 그리고 간부회의 같은 거 다 없애고 전원회의 체계로. 그러면서 평 활동가로 끝까지 복무하는 전례를 보여야지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근데 그게 쉽지 않아요. 나이가 드니까 후배들이 쓴 글을 보면 마음에 안들고, 그러면 네다섯번씩 고친 다음 내가 다시 쓰는 일도 생기고 꼰대처럼 하게 되는 경우가 늘더라구요. 그런 내 모습이 싫기도 했어요.

 

새로운 걸 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는데, 사랑방에서 저를 연구소로 내부 발령을 냈어요. 근데 솔직히 10여년 동안 길거리에서 데모하면서 손에서 책을 놓고 있었는데 처음에 연구소에 배치되어 하루 종일 책을 볼려니 너무 우울한거예요. 30분 이상 책을 보기가 힘들고 졸렸어요. 그런데 이걸 내가 읽고 소화해서 뭔가를 해야 하는 게 임무인데 그게 잘 안되니까 좌절이 6개월 이상 가더라구요. 우울해죽겠다 이러다가 책이 조금 익숙해지는데 1년 넘게 걸리더라고요. 근데 내부 체계는 2년마다 교체거든요. 연구원 2년이면 또 교체되는 시기가 되는거죠. 근데 내가 보니까 1년만에 책 잡게 됐는데 2년만에 교체면 말도 안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인권이론으로 뭔가 하고 싶으면 로테이션 하면 안된다, 로테이션 하더라도 붙박이를 둔 상태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그래서 내가 연구소 활동을 2년 연장했어요.

 

하다보니까 정말 공부라는 건 세월이더라구요. 공부는 왕도가 없다 그 말이 정말 맞는 거 같아요. 근데 인권의 철학, 역사 처음부터 공부해야 했어요. 우리가 처음 인권운동 할 때는 공부를 할려고 해도 책이 없었거든요. 인권에 관한 책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도 얼마 안됐어요. 그러니까 원본도 봐야 하고 이제 막 쏟아져 나온 책 소화하기도 바빴어요. 연구소 활동을 연장해서 이제 인권이론의 ,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맨날 데모나가서 잡히고, 평택에 나가서 맞고, 이런 상황에서 (사랑방) 위층에서 책을 보고 있으려니 그 상황이 미치겠더라구요. 사람들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도 인권문헌연구 쓰고 있는게..

 

그리고 또 하나는 어느 순간 템포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나는 공부가 이런 정도의 스케쥴에서, 6개월 정도는 파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회의에서는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중장기적 전략을 내놓으라는 거죠. 이제 ,하고 있는데 그런게 어떻게 나오겠어요. 그래서 연구소는 사랑방과 독립해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총회에 제안을 했어요 그리고 원래 사랑방은 백화점식의 큰 조직을 지향하지 않았고 자립할 수 있을 때쯤에는 다 별도로 독립하자는 것이 원칙이기도 했었죠. 다만 그때까지는 다들 독립이 겁나서 못했던 거죠. 그런데 저는 대책없이 저지르는 성격이라 독립하겠다고 했죠. 연구소 독립하고 공간도 독립하겠다고. 총회에 제안하니까 처음에 후배들이 공간은 같이 써야 하지 않겠냐며 말렸죠. 그치만 전 결심을 하고 한달만에 나왔어요. 땡전 한푼 없는 상태였는데.

 

희망법: 인권연구소 창이 처음인가요. 그 다음에 인권교육센터 들서울인권영화제도 사랑방에서 독립한거죠?

 

류은숙: . 제가 처음이었죠. 근데 한달만에 나오긴 했는데 제가 돈이 없잖아요. 보증금을 빌려서 사무실을 구하고 2년 정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건물에 있다가, 그곳이 재건축으로 나가라고 해서 지금 이 공간으로 이사왔죠. 보증금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4.9 재단에서 신생단체 지원으로 보증금중 일부를 지원해주셨어요.

 

희망법: 다른 활동가 분들로부터 많이 지치면 창에 가서 쉬다 오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활동가분들이 이곳을 재충전의 공간으로 생각하는거 같은데요.

 

류은숙: 술을 공짜로 주거든요(웃음). 그러기도 하고 여기서 하는 세미나가 평소에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니까요. 활동가들이 뭔가 자기가 모자라다고 느끼는 게 있는데 그런 걸 대학원이나 이런데서 배울수가 없거든요. 근데 여기서는 지금 필요한 공부를 할 수 있고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이 서로간의 대화를 통해서 배울 수 있어요. 여기서는 정말 서로 학습인게 눈치 같은거 안보고 마음껏 토론을 할 수 있으니까요. 일단 그게 쉼이라는 의미가 있고.

 

 

희망법에게 바라는 것

 

<사진 3. 창 사무실에 임시로 희망법이 들어와 일하던 모습>

 

희망법: 저희가 선배 덕에 이곳저곳 전전하다가 창에서 안정적으로 개소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죠. 감사합니다.

 

류은숙: 사실 그때 저도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아무도 안 보고 좀 쉬고 싶을 때였어요. 제가 사람을 많이 만나고 강연도 많이 다니다 보니 가끔씩 말하는 게 무서울 때가 있거든요. 말을 안하고 강연이나 집회에서 발언도 안하고 나 혼자 조용히 책만 보는 시간을 일년에 한달 정도는 갖고 싶었어요. 근데 돈도 없이 단체 만든다는데 이걸 거절할 수가 없었죠.

 

희망법: 희망법 활동하는거 보시면 어떠세요?

 

류은숙: 아직은 잘 모르죠. 그런데 이 단체는 너무 착하려고만 하지는 않는다 이런 생각은 들어요. 너무 착하려고만 하면 그 일의 한계는 뻔하거든요. 누구 한 두 사람 구제해 줄 수는 있지만 뭔가 더 큰 변화는 없잖아요. 근데 구체적인 일과 근본적인 변화를 동시에 생각해야 하는게 그게 정치적인 거라고 생각하고 희망법은 좀 더 도발적이고 정치적으로 활동했으면 좋겠어요. 희망법은 아직 시도 단계니까 그런 가능성을 가졌으면 하는 게 제 바램인거죠. 누군가가 희망법 활동을 보며 너무 성소수자 관련 활동만 많이 하는거 아냐? 라고 누가 물으면 도발적으로 받아쳐야죠. 이 사회가 너무 성소수자 이야기를 안해왔잖아 이렇게요. 우리는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는 단체 이러며 소극적으로 변명하는 그런 착한 척 말고.

 

희망법은 자립적으로 시작했으니 좀 더 도발적이고 정치적이고, 그래서 좀 더 현장에 많이 나오고 인권단체들과 많이 교류했으면 좋겠어요. 인권이나 정치적 감각이라는게 책으로 배워지는게 아니거든요. 평등이라는게 책으로 배워지는게 아니라 같이 나란히 싸워보는 경험이 평등인거죠.

 

 

식당 아르바이트. 자신감

 

희망법: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신다고 들었는데 일주일에 몇시간씩 하시나요?

 

류은숙: 토요일, 일요일 하루종일 하고 월요일 오후 2시까지 하니까 28시간이네요. 그리고 주중에도 휴일이 있으면 알바를 가죠.

 

희망법: 휴일에는 집회가 많잖아요. 참석하고 싶은 곳에 못가고 몸도 많이 힘들텐데 계속 아르바이트를 하시면서 오는 충족감은 무엇일까요?

 

류은숙: 자신감이죠. 누구 눈치도 안 볼수 있는. 내 밥벌이로 어디 기웃거리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 살아보니까 잘 사는데 돈이 그렇게 많이 필요치는 않은 거 같아요. 제가 인권운동하면서 번 돈이 많지는 않지만 돈이 그리 부족하지 않았거든요. 차 없고 집이 없으니까 들어가는 돈이 많지 않고. 돈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그렇게 많이 들진 않아요. 하고 싶은 일들은 해요. 여행가고 싶을 때 저지르기도 하고. 돈이 풍족해서 여행가는 게 아니라 그냥 저지르는 거죠.

 

 

인권 3부작

 

희망법: 올해 계획하신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요?

 

류은숙: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네요(웃음). 사실 올해 목표는 사회권에 관한 책을 쓰는 건데요. 인권에서 제일 소홀히 되는 부분이 사회권인데 국내용으로는 사회권에 관한 책이 별로 없고 외국책은 주로 국제인권규약 해설집 정도잖아요. 그래서 생동감 있는 사회권에 관한 책을 쓰는 게 올해 목표예요. 그걸 쓰면 저의 3부작이 완성되는 거예요. 인권의 역사에 관한 책을 썼고(인권을 외치다), 연대에 관해 썼고(사람인 까닭에). 그리고 사회권에 관한 책을 쓰면 완성되는거죠. 올해는 그걸 해야 되요.

 

<사진 4. 류은숙 활동가의 책, 인권을 외치다. 사람인 까닭에>

 

그 이후로도 밤 늦게까지 희망법과 류은숙 선배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담을 수 없기에 인터뷰 기록은 여기서 멈춥니다. 언제나 희망법에 현장을 일깨워주고, 원칙을 환기시켜주는 류은숙 선배. 고맙습니다.

정리 _서선영